Essay ·

마주하는 것.

Facing.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참 많다.

그리고 이것저것 해보며 이전까지는 몰랐던 세상의 이면을 보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얻는다. (새로운 경험을 업으로 하는 직업은 없을까!)

하지만, 그만큼 많은 상황에 처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몇몇 사람들에게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좋다는 감정 이상으로 행복함, 신기함, 부러움을 경험하는 때가 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멋진 삶을 살아나가는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호기로운 마음에, 어느 순간 그들의 잣대로 나를 평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나를 잘 정의하고, 나의 정체성과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명확히 해야겠다고. 내가 다른 빛을 봐도 그늘지지 않고 함께 빛날 수 있도록.

그래서 GSSC를 마무리하고 포항으로 내려가는 KTX에서 노트북을 켜고 무작정 적어보는 중이다.

어떻게 보면, 순간적인 충동으로 쓰는 글이기에 나중에는 생각이 또 바뀔 수 있겠지만, 현재 나의 정체성은 “마주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사람, 상황, 고통을 마주하는 사람이다.

첫 번째는 사람이다.

나는 많은 사람을 마주하고 그들로부터 그들의 삶을 듣는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자신의 세계에서는 주인공이다.

다만 스스로가 주인공인지 모르거나, “나”라는 책의 표지를 넘겨볼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아직 많다.

이 부분 또한 “마주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 또한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 못지않게 즐겁다.

두 번째는 상황이다.

세 번째 요소가 “고통”이기에, 여기서는 긍적적이거나 중립적인 상황을 다루고자 한다.

나는 행복의 역치가 낮은 편이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을 보고 따뜻한 햇살을 쬐며 걸어가기만 해도 행복을 느끼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행복을 느낀다.

내가 매 순간 처하는 “중립적일 수 있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고통이다.

인류는 예전부터 위험을 회피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달려오는 매머드를 보고 마주하는 원시인은 살아남을 수 없었고, 그러한 인류의 특성은 자연스레 현대의 우리에게도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다르다. 나에게 갑자기 매머드가 달려오지도 않을뿐더러, 기본적인 일상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경우가 오래전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게 적다.

하지만, 우리의 특성은 그대로이다. 어렵고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을 보면 그냥 피해버리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정말 다양한 상황에서 말이다.

하지만, 피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생각의 확장도, 성장도 없다.

살아남는 것이 유일무이한 이유였던 오래전 인류와는 사회가 달라졌다. 따라서, 살아남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며, 나라는 존재가 계속해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마주했을 때 회피하고자 하는 자세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특히 감정적) 고통을 느낄 때면, 그 고통을 마주하고 온전히 바라본다. 마치 “너라는 감정이 뭔데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보자”라는 듯한 태도로 말이다.

놀랍게도 고통을 마주하고 직시하면 더 이상 이전처럼은 힘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고통이라는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이를 실천한다. 이 과정을 체화하고 난 후에 비로소 “No pain, no gain”의 의미를 깨달았다.

지금 생각하는 나의 정체성을 충동적이지만 글로 남겨보았다. 어수선하고 두서없을 수 있지만, 이렇게나마 글로 나의 생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나에게 오랜만에 글쓰기의 동기를 부여해준 사람에게 감사를 전한다.

사진은 최근에 내가 빠진, 그리고 글을 쓰며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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